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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알랑가 몰라! "타인능해(他人能解)”

만석꾼의 교훈
구례 운조루

유장수 칼럼  

 

 

  흔히 우리 한반도의 모양을 토끼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호랑이 형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는 것 같다.

  이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어서 정확한 답이 없으니 어느 쪽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토끼를 닮았다는 말의 근원이 일제 치하 우리를 비하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입에서 처음 발설되었다는 설이 있으니, 비록 토끼 형상이라는 그 시각이 근사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에 반(反)해서 나온 것이 호랑이를 닮았다는 주장일 것인바 우리나라 한반도의 지형이 토끼를 닮았으면 어떻고, 호랑이 모양이면 또 어떻다는 것인가?

 

  그런데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또 하나의 다른 견해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어 대충 소개하고자 한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우리 한반도의 형상을 이제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함경도 지방의 지형을 바람에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칼로 보며, 따라서 신의주 부근의 돌출된 곳은 여인의 얼굴이고, 해주·강화도 부근은 여인의 가슴, 그리고 목포 부근은 여인의 무릎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 여인의 형상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는 지금의 전라남도 구례 부근이라고 한다.

  이곳은 여인의 음부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잉태와 출산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곧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제일의 길지임에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3대 길지 즉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귀몰이(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소문난 명당자리가 있다고 알려진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내려가는 섬진강을 따라 나있는 아스팔트길을 차로 달리다 보면 토지면 어귀에 왼쪽으로 운조루(雲鳥樓)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운조루는 도로에서 북쪽으로 백여 미터 들어가 있다.

 

  이 건물은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문화류씨 후손 류이주가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조카를 시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본디 지금의 대구 출신인데, 구례 부근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금환락지의 좋은 자리라 믿고 99 칸의 품자형(品字形) 저택을 지은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며, 지금은 77칸만 남아 있다.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방구들이 아자형(亞字形)의 흔치 않은 구들 방식이어서 옛 우리의 온돌 문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하다고 한다.

운조루 앞에는 사방을 돌로 쌓아올린 10여 평 남짓 되는 네모난 연못이 하나 있다. 건축할 당시부터 대문 앞 도랑에 맑은 물이 흘러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이 물은 지리산의 한 쪽 자락인 뒷산에서 겨우내 내린 하얀 눈이 서서히 녹아 흘러내린 물줄기다. 계곡 따라 물길 따라 내려오던 이 물은 운조루 앞 연못에 이르러 잠시 발길을 멈춘다. 지금은 수련이 싱싱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거니와 꽃이 필 때면 그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는 광경이 또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런데 오래 전 어느 날, 그 맑고 솔 내 나는 이 연못의 물에 이끌려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시간을 희롱하며 즐기다가 급기야 새벽녘이 다가옴을 뒤늦게 알고 서둘러 하늘로 오르게 되었는데, 바삐 서두르다가 그만 한 선녀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떨어뜨렸는데, 그 반지가 떨어진 곳이 바로 이 운조루 앞 연못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이곳 운조루(雲鳥樓) 대문 앞 연못 자리가 풍수지리에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길지라고 전해진다.

  또한 운조루 건축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할 때 거북처럼 생긴 돌이 출토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운조루 안채 부엌 부근은 금 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있는 형국의 금귀몰이(金龜沒泥) 자리라고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운조루(雲鳥樓) 동남쪽으로 먼발치 시야가 닿는 곳에는 돌무더기를 쌓아 두었던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다섯 개의 보물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 같은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로 보았다. 이러한 설들이 있어 운조루는 그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빼어난 길지(吉地)라는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3대 명당, 즉 금환락지, 금귀몰이, 오보교취의 요건을 모두 갖춘 운조루라 할지라도 세월의 간극에는 어찌 할 수 없었나 보다. 여러 수십 풍상을 겪고 난 지금, 당시의 번듯하고 우람했을 만석(萬石)꾼의 자태(姿態)는 끝내 그대로 지키지 못하고, 다만 전설처럼 아는 이들의 입속에서만 맴돌고 있음이 안타깝다.

 

  그런데 운조루(雲鳥樓)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짜 보물이 하나 있다.

커다란 통나무를 속을 파내어 만든 쌀독이 바로 그것이다. 쌀 두어 섬은 능히 들어갈 수 있는 큼지막한 이 쌀독은 아랫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쌀이 나오도록 했다. 물론 평상시에는 쌀이 나오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쌀이 필요할 때만 그 막힌 부분을 열고 필요한 만큼만 쌀을 빼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명패를 아래쪽에 붙여 놓았다.

 

“他人能解”란 ‘다른 사람도 능히 이 잠긴 것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이란 ‘이 집과 관계가 없는 사람을 일컬음’이다. 그러니 아무나 허락받지 아니하고,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나 여기에서 허기를 면하는데 필요한 만큼 쌀을 빼내 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시쳇말로 이것은 무료 쌀 배급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터인데, 그들에게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겠는가?

“가난은 임금님도 어찌 할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임금도 굶주린 백성들을 모두 구휼(救恤)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운조루에서는 실제로 가진 자의 재산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애민(愛民) 애휼(愛恤)의 정신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나눔의 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한 것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금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이에게, 부족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진짜 사람 냄새나는 따스한 마음을 실천하는 모범적 사례라 할 것이다. 이는 확실히 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값진 귀감이 될 만하다.

 

“他人能解”


이러한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나눔을 실천한 정이 넘치는 따끈한 마음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우리에게 눈시울 찡한 울림으로 다가온다.